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코틀랜드 왕국 (문단 편집) === 17세기 === 당시 잉글랜드는 의회와 국왕이 대립하던 끝에 찰스가 의회를 철폐하고 혼자서 직접 국가를 다스리던 11년 폭정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Covenanter) 반란군은 정부를 장악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잉글랜드로 남진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의 발단이 된 주교 전쟁을 일으켰다. 언약파 반란군이 국경 지대인 뉴번에서 잉글랜드 국왕군을 물리치고 거의 저항없이 잉글랜드 북부의 관문 [[뉴캐슬어폰타인]]에 입성하자 찰스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면서 왕실을 더 약화시킬 것을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찰스의 종교적, 정치적으로 충신 역할을 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하고 사형시켜 버렸다. 분노한 찰스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반기를 든 의원 다섯 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가나 이들은 도망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국왕과 의회 간의 관계는 파탄났고 찰스를 더욱 못 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 없이 민병대 소집법(The Militia Ordinance)을 통과시켜 버렸다. 찰스도 의회의 비준 없이 혼자서 군열 위임령(Commissions of Arrays)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과격파 청교도들은 잉글랜드보다 3년이나 일찍이었던 1638년에 이미 왕권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면서 혁명을 이루었고 스코틀랜드가 찰스 1세의 권력을 약화시켜 잉글랜드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정부를 구성했던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반란을 멈추면 장로회를 공식 국교회로 인정하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찰스 측과 장로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도 장로회를 도입하겠다고까지 했던 의회 측 사이에서 고민하다 1641년 10월 반언약파 근왕파 귀족들의 반란 시도를 분쇄한 이후[* 찰스는 본인과 전혀 무관한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근왕파 귀족들이 저질렀던 것이라 주장했는데, 몬트로즈 공작을 비롯해 반란을 시도했던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정국과 왕에 대한 입장과는 별개로 하이랜드 클랜 이권 분쟁을 통해 언약파 정부의 요직을 주로 차지한 캠밸 가 계열의 귀족들과 뿌리 깊은 원한 관계였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 없는 변명은 아니다. 이후에도 적어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 벌어진 영국 내전은 근왕과 의회, 급진 칼뱅파와 성공회식 교구파 같은 이념적 지향점과는 별로 상관 없이 주로 친 캠밸 가문이냐 반 캠밸 가문이냐라는 지극히 지역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결국 1643년 근엄 동맹과 언약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라는 조약을 통해 의회파와 동맹을 맺으면서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내전에 뛰어든다. 언약파는 전쟁 시기 내내 스코틀랜드의 정부 역할을 하면서 남쪽으로는 잉글랜드의 국왕군, 북쪽과 서쪽으로는 로우랜드 개신교도들의 통치와 무엇보다 캠밸 가문의 영향력의 확대를 견제했던 하이랜드와 아일랜드의 클랜들이 소집한 근왕군, 바다 건너 [[아일랜드 왕국|아일랜드]]의 [[얼스터]]에서는 가톨릭 킬케니 연맹의 반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동시에 안쪽으로는 내분하면서도 [[올리버 크롬웰]]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독자적인 전시 정부를 꾸린다. 당시 언약파 혁명 정부가 모집한 스코틀랜드 군대는 비상 소집되어 급조되었으나 인적 자원이 대부분 열정적인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한창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유럽 대륙의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휘하에서 종군한 용병들과 캠밸 가문을 필두로 했던 언약파 클랜들 휘하 사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속적으로 군사 기술이 발전하던 17세기 초중반 대륙의 선진 용병술을 몸으로 배우고 온 전직 용병들이나 일상이 전쟁이고 아직도 성인 남성 개개인에게 '전사'라 할만한 전투력을 사회적 소양으로 요구하던 하이랜더들 모두,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40년 가까이 대규모 분쟁에 휘말린 적 없던 잉글랜드에서 평상시 치안 유지용 민병대들을 급조한 의회파, 국왕파 양쪽 모두와 비교해도 병력의 질적으로 우월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언약파 정부는 안 그래도 인구도 적으면서도 자체적으로도 내전 상태인 반쪽짜리 스코틀랜드 뿐이지만 크롬웰과 페어펙스가 아예 대륙식으로 첨단 교리와 훈련 체계까지 이식시킨 신군대 (New Model Army)를 도입할 때까지 한쪽에 가세하기만 하면 전쟁의 균형을 완전히 기울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숙련되고 강력한 주력은 잉글랜드에서 내전을 도와주느라 비운 사이 초기 언약파 주요 지도자 중 하나였으나 다른 지도자 클랜 캠밸에 대한 원한 관계로 인해 언약파 정부를 통수치고 근왕파로 돌아선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레헴이 클랜 도널과 동맹을 맺고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일으켰던 내전으로 한때 에딘버러 본진 바로 앞까지 밀릴 만큼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언약파 혁명 정부의 군사적 우위도 지속되는 전쟁에서 초기에 대륙에서 군종한 숙련병들을 하나씩 잃으면서 무더져갔던 반면 잉글랜드 의회파에서 페어펙스와 크롬웰의 주도로 군제 개혁을 마쳤다. 원래 합의했던 내용인 장로교회의 잉글랜드 도입에 잉글랜드 측의 반대가 강해지면서 1643년만 하더라도 근엄 동맹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나섰던 스코틀랜드 언약파 정부의 입지도 불안해졌다.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고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를 배신하여 잉글랜드 왕당파를 지원한다. 그러나 3차 내전과 던바, 우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대파당하고 크롬웰에게 스코틀랜드가 정복당했다. [[왕정복고]] 시절에 언약파가 아버지의 목이 날아간 전쟁이 일어났던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찰스 2세는 아가일 공작 아치볼드 캠밸, 장로 총회 집사였던 워리스톤의 아치볼드 존스턴 경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반란을 일으켰던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서 처형하고 옥사시켜 분쇄했다. 크롬웰은 양국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있었던 의심하는 태도로 스코틀랜드를 대했으나 일단 사상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개신교 급진파고 전쟁 막판 전까지는 동맹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이후에도 딱히 정치 보복을 가하진 않았다. 수십만 명이라는 당대에는 경이로울 만큼의 희생자가 나온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던 아일랜드와 심각하게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며, 끝까지 크롬웰 시절의 역사적 원한을 잊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종교의 차이로 인해 결국 장기적으로 반영국 민족주의가 발달해 독립 국가를 추구하게 된 아일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가 비교적 쉽게 연합왕국이란 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약파가 이루어 놓은 새로운 혁명 정부의 행정적 기틀과 전시 상황에서 구축한 통제력 등은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가 물려 받았고 장로회 급진파도 스코틀랜드 사회 지배 계급으로 떠오르면서 17세기 말에 다시 한번 왕실과 충돌했다. [[명예 혁명]]이 일어나자 언약파를 계승한 로우랜드의 장로회 측은 새로운 왕실을 받아들이고 마찬가지로 가톨릭/성공회 주류를 계승한 하이랜드의 클랜들은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하면서 다시 한번 내전이 발생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